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문단 편집) ==== 로마 포위전 (546년) ==== 벨리사리우스가 디라키움에 묶여있는 동안, 토틸라는 북진하여 로마시 인근의 티볼리에 사령부를 차리고 포위를 시작하였다.(545년 겨울) 그리고 토틸라는 로마시 측에 사절을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거절당하였고, 시민들은 적과 내통할 가능성이 있는 [[아리우스파]] 사제들을 추방하였다. 전투 없이 도시에 입성하고 싶었던 토틸라는 식량 공급을 끊은 채로 3천의 수비대와 시민들의 항전 의지를 말그대로 말려 죽일 의도였다. 당시 수비대 사령관 베사스[* 고트족 진영에서 로마 측으로 전향한 장군]는 [[군납비리|군용 식량을 시민들에게 터무니없는 고가로 팔아넘기는]] 데에만 치중한 탐욕스러운 사령관이었고 따라서 모두들 벨리사리우스의 구원 부대만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던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해가 546년으로 바뀌었고, 봄이 되자 벨리사리우스는 디라키움에서 함대를 이끌고 출항하였다. 한편, 벨리사리우스의 함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토틸라는 테베레 강 하류에 쇠사슬 등 각종 장애물과 강을 가로지르는 목재 다리를 세웠으며, 다리의 양끝에는 정예병 2백과 투석기 등이 배치된 탑을 세웠다. 546년 5월, 벨리사리우스는 테베레 강 하구에 도착하여 포르투스에 보급 기지를 꾸렸고 베사스와 연락을 취하여 성 안밖에서 동고트 군대를 공격하자는 작전을 세웠다. 로마시의 상황이 심각한 것을 파악한 그는 부장 이사키오스에게 보급기지의 군량과 자신의 아내 안토니나를 부탁하고 자신은 2백여 척의 선박에 공성병기와 유황, 역청 등 을 지니고 소를 동원하여 배를 끌게하는 등 테베레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벨리사리우스는 강의 양안에 배치한 기병대와 함께 진군하며 토틸라가 설치해 놓은 요새들을 하나 하나씩 격파, 마지막 관문인 탑이 설치된 목재 교각에 도달하였는데 충격적인 소식 두 개를 접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치고 나오기로 약속한 베사스가 움직이지 않은 것이었다. 벨리사리우스는 분노하였으나 눈앞의 적군에 집중, 두 탑 중 하나를 무너뜨리고 반대편의 탑을 공략하려하였다. 그 찰나, 두 번째 소식이 그를 강타하였다. "벨리사리우스가 패배하였다 !" 라는 외침과 함께, 보급 기지를 지키던 이사키오스가 선불리 움직였다가 동고트 군에게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도달한 것이다. 보급 없이 적진에서 고립될 것과 아내 안토니나의 안전에 대한 걱정에 사로잡힌 벨리사리우스는 후퇴를 명하였다. 하지만 포르투스로 돌아와보니 보급 기지는 안전하였고, 안토니나도 마찬가지였다. 실상은 이사키오스와 소수의 병사들만 사로잡힌 것이었다. 한편, 기세를 얻은 동고트 측에 비하여 동로마 측은 사기를 잃었고 벨리사리우스는 병까지 얻게 되었다. 결국 그는 다음을 기약하며, 로마시를 버리고 철수하였다. 546년 여름부터는 본격적인 공성전이 시작되었고, 동시에 포위가 더욱 강화되어 로마시의 식량 사정은 갈수록 악화되었다. 이에 포위 직전에 [[시라쿠사]]로 피신한 교황 [[비질리오]]가 구원을 위해 곡물을 가득 실은 선박을 보내었지만 테베레 강 하류에서 고트족 함대에 나포되어 되려 도시의 사기가 떨어졌다. 이후 546년이 지나도록 포위가 지속되며 포위가 지속되어 로마 시민들은 극심한 기아에 시달렸다고 한다. 프로코피우스의 저술에 의하면, 군대로부터 식량을 사먹을 정도로 부유하지 못했던 대다수는 건초, 쐐기풀, 개와 쥐까지 먹으며 목숨을 이어갔는데 그중 많은 이들이 아사하였다고 한다. >토틸라에게 완벽히 포위된 로마 시내에서는 모든 물자가 부족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식량 문제가 가장 심각하였고, 상황은 나날이 악화되었다. 사람들은 평소에 먹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까지 찾아다니게 되었다. >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파견된 장군들은 병사들 몫으로 저장되어 있던 밀을 시민들에게 비싸게 파는 데 열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살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1 모디우스[* 약 10리터]의 밀을 사려면 금화 일곱 닢이 필요할 만큼 값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 >그래서 시민 대다수는 신전이나 목욕장, 공회당이 허물어진 자리에 나던 쐐기풀을 캐먹을 수밖에 없었다. 로마 시내에 유일하게 풍족했던 식물이기 때문이 었다. 다만 잔가시가 있어 그대로 먹으면 입 안과 목구멍에 상처가 난다. 따라서 부드러워질 때까지 데쳐야 했다. 하지만 쐐기풀만 먹으면 기력이 떨어진다. '''사람들은 포위가 길어질수록 비쩍 야위여갔고, 안색도 납빛으로 변하여 망령들이 걸어다니는 것 같았다. 도저히 영혼이 남아 있다고 보기 힘든 사람들은 쐐기풀을 질겅질겅 씹으며 걷다가 갑자기 픽 쓰러져 죽었다. 시내에는 매장지도 없었기에 주검은 길가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아사자가 속출하는 것을 보다 못한 베사스는 시민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었는데,[* 입을 줄이고자 하였던 벨리사리우스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는 설도 있는데, 사실상 시민들을 무책임하게도 토틸라의 관용에 맡기고 유기한 것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토틸라는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고, 상당수가 기력이 쇠해 쓰러져 죽거나 고트족 병사들에 살해되었다. 당시 로마시의 인구는 오랜 전란에도 불구하고 10만에 육박하였다고 하는데, 그들 중 상당수가 546년의 이 포위로 일부 상류층을 제외하고는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두 장수는 마침내 시민들이 도시를 떠나 각자 원하는 곳으로 피난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럼에도 로마에 잔류하기를 선택한 이들은 소수였고, 대다수는 떠나는 편을 택했다. 하지만 열린 성문 밖으로 나온 이들은 길을 걷는 동안 차례로 쓰러졌다. 오랜 굶주림으로 체력이 바닥난 그들에게 걷는 것조차 버거웠기 때문이다. 이들은 길가에서, 혹은 근처를 흐르는 시냇가에서 차례로 죽음을 맞았다. 가도를 따라 앞으로 나아간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던 고트족 병사들을 만났다. 고트족 병정들은 싸울 필요조차 없었다. 저항할 기력도 없는 피난민들은 그들의 창에 찔려 죽었다. > >'''이것이 과거에는 전 세계 사람들의 동경의 눈으로 바라보던, 빛나는 로마 시민의 현재 모습이었다.''' 로마시는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다가 546년 12월에 한 이사우리아인 병사의 배신으로 동고트 병사들이 밤중에 성벽 일부를 허물고 잠입하면서 성문이 열려 함락되었다. 토틸라는 12월 17일에 아시나리아 문을 통해 도시에 입성할 수 있었다. 동시에 대부분의 수비대는 도주하였고, 5백 명만이 남았다고 한다. 도시는 410년과 455년에 이어 대대적으로 약탈이 자행되었고,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시민들과 병사들은 교회에 숨었으나 26명의 병사들과 60명의 시민들이 고트족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본래 토틸라는 '''로마를 목초지'''로 바꾸려 하였다고 전해진다. 도시 기능을 못하게 하여 동로마 측과 계속되던 로마시 쟁탈전을 끝내려 한 것으로 보이는데, 벨리사리우스의 간곡한 편지를 받고 철회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토틸라가 시내에 잔류하던 원로원 의원들과 그 가족을 인질로 잡고,[* 시오노 나나미에 의하면 그들은 이후 토틸라를 따라다니며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다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이때가 1300여 년간 권세를 자랑하며 이어오던 로마 원로원의 소멸이라고 주장한다. 603년에 로마 원로원이 포카스 황제 부부의 석상을 요구하는 것으로 마지막 언급이 있었다. 630년에 원로원 회당이 교황 [[호노리오 1세]]에 의해 성당으로 개조되며 최종적으로 소멸된 듯하다.] 아우렐리우스 성벽을 1/3가량 파괴하여 성곽 구실을 못하게 한 것은 막지 못하였다. 아리우스파였지만 독실한 기독교도였던 토틸라는 입성 직후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참배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